0. 한국의 재벌이 문어발이 된 이유
미발달된 금융시장으로 인한 문제의 중첩과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는 등으로 인해 대내외적 경제위기가 발생하면서, 1972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7.2%로 69년의 경제성장률인 14.5%의 절반 이하로 추락했다. 즉, 대내외적 경제위기가 발생하면서 경제가 위축된 것이다. 기업들은 사채를 끌어다 썼고, 부채의 늪에 빠져 도산 위기에 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문제해결을 위해 72년 8월 3일 자정이 되기 직전에 8·3조치를 발표한다. 8·3조치는 300만 원 이상의 사채를 동결하고, 돈을 돌려받고 싶으면 채권자들이 빌려준 돈의 출처를 밝혀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정치권의 검은 돈이나 위장사채(자기 기업에 스스로 사채놀이를 해 기업은 적자, 기업가는 이득을 보는 사채)가 기업에 대한 출자금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72년 10월에 공포된 유신헌법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내린 특단의 조치에 대한 후속조치이다. 이후 기업들은 자회사 혹은 계열사들을 만들어 여러 사업에 공격적으로 투자할 수 있었다. 대기업들은 그렇게 지금까지 한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해 가고 있다.
언론에서 자주 다루는 소위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은 대부분 8·3조치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시작된다.
1. 은산분리
카카오뱅크, K뱅크 등 산업자본의 인터넷전문은행 설립 이슈가 뜨겁다. 인터넷전문은행들의 금산분리 혹은 은산분리 원칙에 대한 예외 인정 여부 논쟁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외를 인정받았는가?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그러나 논의해야 할 부분이 남아있다. 지금부터 금산분리 혹은 은산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
은산분리(seperation of bank and commerce)는 산업자본과 신용창조 기능이 있는 은행이 결합되지 못하게 함을 원칙으로 하는 정책기조라고 할 수 있다. 논리는 이렇다. 요구불예금을 취급하고 예금 및 대출을 담당하는 은행은 신용창조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산업자본을 지배할 수 있다. 은산결합은 대략적으로 2가지 종류가 있는데, 산업이 은행을 지배하는 것 혹은 은행이 산업을 지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100억을 은행에 예금했다고 하면, 은행은 중앙은행에서 정한 지급준비율만큼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출하거나 활용할 수 있다. 가령 지급준비율이 1%라고 치면, 1억을 제외한 99억으로 어떤 회사를 산다. 돈은 문서상으로 기업가에게 가겠지만, 결국 돈은 은행에 그대로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기업가는 은행에 다시 예금할 것이다. 은행은 받은 돈 혹은 존재하는 돈으로 다시 다른 기업을 사들인다. 이것이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공황을 전후로 이러한 일이 은행들의 주도로 일어났고, 이에 따른 경제적 악영향이 크다고 생각하여 법을 제정하게 된다. 바로 글래스-스티걸 법이다. 이 법을 통해 은행의 산업 지배가 규제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은행지주회사법 등을 통해 산업이 은행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규제 역시 개시되었다. 논리는 역시 마찬가지로, 산업자본에 의한 은행지배 역시 은산결합을 통해 다른 기업의 대출 방해, 리스크 증대 등이 이유였다.
2. 현재 한국의 은행과 은행·금융업에 대한 규제, 은산분리에서 금산분리로
한국의 은산분리는 재벌들의 문어발식 경영에 대한 두려움에서부터 시작됐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산업자본을 쥐고 있는 재벌들이 은행을 사금고화해 계열사를 확장하고 경영권유지에 활용한다는 ‘사금고화론’, 은행과 산업자본의 결합으로 인해 위기 시 동시 파산할 수 있다는 ‘동시 파산론’, 대출을 받아 채무를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기업이 은행을 소유·운영함으로써 피감시자에서 감시자가 된다는 ‘지위망각론’ 등이다.
이런 이유에서 1983년 은행법 개정을 통해 사실상의 은산분리가 실시되었다(다만 ‘은산분리’의 직접적 언급은 없었음). 이후 IMF 사태와 노무현 정부의 반기업적 정책 등을 거쳐 은행법,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등이 제정되었다. 문제는 금산법 24조에서 시작된다. 금산법 24조는 '금융기관'을 이용한 기업결합의 제한에 대해 다루고 있는 5장의 일부이다. '금융'과 산업이 결합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97년 IMF 사태 전후로 한국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가던 와중에 조잡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중요한 점은 금산법이 미국의 법을 차용하면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Financing' 등을 은행의 자금 융통으로 해석하지 않고, 전후 맥락 없이 단순하게 금융으로 번역하였다. 이후 광범위한 의미에서 '금융' 업무를 맡는 카드사, 보험사에도 법이 적용되고 다시 새로운 규제법이 만들어지면서 '은산분리'에서 '금산분리'로 정책이 변질되었다.
규제의 백화점이라 불리는 한국에서 규제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기업의 숨통을 조이는 법들이다. 기업을 옹호하는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은 질문은 "워렌 버핏 아시죠?"이다. 워렌 버핏의 버크셔 헤서웨이는 보험회사이자 금융회사이다. 지주회사로서 온갖 기업의 주식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은행의 주식까지 가지고 있다. 한국의 이런 규제 하에서는 절대 그런 금융회사는 만들어질 수 없다. 토종 금융자본 역시 마찬가지다.
3. 카카오뱅크를 비롯한 인터넷전문은행의 대두
최근 10년 동안 스마트폰을 필두로 한 과학기술은 눈에 띄게 발전하였다. 은행업과 금융업 역시 그 수혜를 입었으며, 잘 활용되고 있는 중이다. 이른바 '핀테크'를 통해서 스마트기기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경제활동이 가능하도록 발전해 나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 인터넷전문은행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중국의 경우 알리바바, 일본의 경우 라쿠텐 뱅크 등 외국에서는 이미 2015년 전후로 활발하게 인터넷전문은행이 운용되고 있다.
오프라인 지점이 없는 은행의 등장은 각종 수수료 등 고객들이 지불하는 비용의 절감을 불렀다. 또한 이러한 은행업 혹은 금융업이 새로운 산업이라고 지목되기 시작됐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인터넷전문은행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여러 논의를 거쳐 인터넷전문은행이 설립되게 되었다. 특이한 점은 인터넷전문은행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중은행들보다 훨씬 완화된 규제를 받는다는 점이다.
카카오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을 둘러싼 금산분리 특혜 적용 논란은 여기서 시작된다. 금산법 24조 등 시중은행에 적용되는 여러 법에 의하면 산업자본이 은행의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의 총 4%를 초과하여 보유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 이상 보유하더라도 역시 4% 초과분에 대해서는 의결권이 없다. 반면에 인터넷전문은행은 34%까지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은행법을 적용받는 시중은행들은 자기 은행의 대주주에게 신용을 공여할 수 있는 범위(돈을 빌려줄 수 있는 정도)에 관하여 자기자본의 25%로 규정되어 있으나, 인터넷전문은행의 경우는 이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4. 왜 인터넷전문은행은 예외일까?
"왜 인터넷전문은행은 예외일까?"에 대한 답은 사실 알 수 없다. 국회에서 법을 만들 때 현실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법철학을 견지하고 제정한 것이 아니라, 편의대로 두들겨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전문은행은 시중은행이 수행하는 거의 모든 업무를 수행할 수 있으며 사실상 차이라고는 오프라인 지점 존재 여부 정도이다.
시중은행과 인터넷전문은행에 의결권 있는 은행 주식 소유와 관련된 법이 다르게 적용될 이유가 없다. 똑같은 업무를 하는데 단지 오프라인 지점 유무에 따른 비용의 차이로 법 적용이 달라진다면, 시중은행 입장에서는 억울할 것이다. 시중은행에 대한 차별이라고 할 만하다. 인터넷전문은행에 적용되는 지분소유제한 법조항이 예전부터 시중은행에 적용되었더라면 사실 카카오뱅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중은행이 민영화됨으로써 주인 있는 은행으로 탈바꿈하고, 혁신을 꾀하는 금융산업을 이끌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전문은행은 대주주에게 아예 돈을 못 빌려주게 함으로써 금산분리 적용이 된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이다. 그것 자체로 과도한 규제이자 또 다른 역차별 문제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은산분리 혹은 금산분리와 관련한 법 적용에 있어서 시중은행을 한국처럼 과도하게 규제하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경우 산업자본이 의결권 있는 은행 주식을 25% 정도 소유할 수 있으며, ILC(Industrial Loan Company)를 통해 산업자본이 대주주가 되는 것도 가능하며 일정규모의 채권(1억 불) 이내로 자산 운용 및 신용공여가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요약하자면, 금산분리 규정을 인터넷전문은행과 시중은행에 다르게 적용할 이유가 없으며 현재의 규제는 둘 모두에게 가혹하다. 은행 및 금융과 관련된 한국의 법은 오류와 무논리로 점철되어 금융산업 발전을 막고 있는 것이다. 문어발 재벌들을 막기 위해서 마련된 금산분리 규정 마련의 이유들은 사실 이제는 사장되어야 할 이론들이다.
동시 파산론은 은행법 35조(자기 은행의 대주주에게 신용을 공여할 수 있는 범위에 관하여 자기자본의 25%로 규정)에 의거한 자산운용 제약 때문에 불가능하다. 코로나로 인해 실물경기는 침체하는 반면 주식이나 부동산, 비트코인이 폭등하는 과잉유동성의 시대이면서 직접금융시장을 통해 얼마든지 자금을 구할 수 있는 기업들이 있는 시대에 사금고화론도 어불성설이다. 피감독자가 감독자가 되려 한다는 지위 망각론 역시 현재의 금융감독 시스템에서 기우에 불과하다.
5. 법과 구조 그리고 정책의 잘못
과도한 은행 주식 지분 제한으로 한국 내의 은행은 주인 없는 은행들이 대다수이다. 굳이 주인을 꼽으라고 한다면 외국 자본이거나 은행을 낙하산 관료들의 종착점으로 만든 국가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세계경제포럼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금융시장성숙도는 87위, 대출의 용이성은 119위, 금융서비스 이용가능성 99위, 은행 건전성 113위이다. 금융 후진국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국내은행들의 비이자이익 비중은 총이익의 10~20% 수준으로 금융선진국 은행들의 40% 수준에 미달한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고객수수료 비중이 적기 때문이다. 수익구조의 다양화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한국은 아직 관치금융이다.
카카오뱅크 등을 둘러싼 금산분리 논쟁은 사실 카카오가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다. 한국의 법과 정치구조 그리고 정책의 잘못이다. 대중들은 지금 카카오의 독점 논란과 함께 카카오뱅크를 특혜 논란으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왜 카카오에게만 특혜를 주느냐 외칠 것이 아니라 시중은행에 대한 과도한 규제를 풀라고 외쳐야 할 때이다.
참고자료
- 인터넷전문은행 도입에 따른 법적 쟁점에 관한 소고 : 금산분리 완화 문제를 중심으로 (박창욱 / 윤창술)
- 인터넷전문은행 설립과 은산분리 규제완화의 시급성
- 금산분리 용어에 대한 소고 (서문식)
- 금산분리제도의 현황과 과제 (윤창현)
- 금산분리 완화의 논거 : 은행소유의 효율성을 중심으로 (이인실, 남주하)
- 은산분리에 대한 몇 가지 논점 : 미국의 경험과 감독기구 기능을 중심으로 (成太胤․朴基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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