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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Column)/Book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에세이

by 방구석베짱이 2021.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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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축적된 인간의 이성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과학·철학·사회제도 등을 발전시키며 유례없는 생산성 증가를 불러왔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과신하고 오용하기 시작했다. 사고를 검증하는 데 이성을 사용하는 대신 겉보기에 그럴싸한 논리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편견을 이성의 이름 아래 정당화했다. 그렇게 인종·종족·민족·국가주의가 탄생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나치)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신과 오용에서 비롯된 오류 속에서 태동했다. 당시 독일의 국민들은 인종·민족주의와 같이 오류와 편견에서 비롯된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며, 히틀러에 열광했고 끝내 그와 나치를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선택했다. 민족·인종주의와 다수의 의사이기만 하면 무엇이든 용인된다는 민주주의 혹은 형식적 법치주의 체제가 결합된 결과였다. 또한 엄격한 관료주의는 잘못된 일이 효율적으로 수행되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종국에는 전체주의로 귀결되었다.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라는 준군사조직에 소속돼 있던 관료로서, 인종·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 대량학살과 강제이주 등의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지위를 가진, 관료제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을 뿐인 사람이었다. 그는 대량학살을 주도한 악마적 인간도 선량한 양심을 가지고 불의에 저항한 인물도 아니었다. 잘못된 방향을 향해 성큼 전진해 나가는 체계에 속한 일개 관료였다. ‘한나 아렌트의 저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다루는 문제도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1930~40년대에 절대적이었던 히틀러의 법과 명령을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동기제로 내면화했다. 그래서 그는 나치 독일의 법과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유대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 즉 대량학살을 마주했을 때도 그 잔인성에 잠시 충격을 받았지만 다른 업무를 맡겠다며 전출을 가지는 않았다. 또한 관료제의 상층에 있는 모두가 대량학살을 위한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가운데 아이히만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았으며 이후에 열심히 부역했다. 이는 당시 나치독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방향에 동조했고, 나치독일의 언어규칙과 자기기만을 체화하면서 현실 혹은 진실과 분리된 사회에 속한 채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악()이 평범성을 띠게 되었다. 이성에 대한 과신과 오용이 무비판적 사고의 싹을 키웠고, 무사유와 비이성이 일반적인 대중들을 잠식하면서 일상 속에 악이 침투해 평범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인종·민족주의와 같은 사상을 대중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마침내 아군과 적을 인위적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반목과 갈등이 지구를 휩쓸었고 인간들의 정신을 지배했다.

 

이성에 대한 과신과 오용에서 비롯된 인종·민족주의 등의 사상과 무사유, 그 사상들을 허용한 무사유의 대중들과 불완전한 민주주의, 오류의 효율적 수행을 위한 관료제, 기이한 양심을 가지고 충실히 나치에 부역한 평범한 악의 화신 아이히만. 20세기 전반기의 유럽을 파멸의 길로 몰고 간 과정을 요약하자면 그렇다.

 

세계를 피로 물들게 한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모습들이 2021년의 한국 사회에서 재현되고 있다. 한국 사회 내에 있는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우리그들을 분리하며, 적대감을 가지고 상대를 짓이기려 하고 있다. 혐오와 갈등이 일상화되고 타인에게 해를 가하려 한다는 측면에서 당시의 유럽과 현재의 한국은 다를 바가 없다. , 지금의 한국 사회는 일종의 전쟁 중에 있는 것이다.

 

역시나 뿌리는 자신들의 이성에 대한 과신과 오용이다. 몇몇의 취사선택된 자료, 양과 질적으로 불충분한 경험적 사례, 그에 기반을 둔 통계를 통해 본인들의 주장이 옳음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제 그 귀결점이 인종·민족주의 정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민족·인종·국적뿐만 아니라 성별·지역·세대 등을 모조리 끌어들여 개인을 어떤 집단의 범주에 속하도록 한다. 각종 주의(-ism)와 반목을 내포한 세계관이 난무한다. 그것들은 여지없이 아군과 적을 구분 짓는 기준점이 된다.

 

대중들은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오류에 매혹되어 그것을 자신들에게 내재된 편견과 불합리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한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곳은 온라인 공간이다.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우리와는 다른 그들에 대해 비난하는 게시물들이 허다하게 업로드 된다. 때때로 그중 일부는 수많은 추천을 받으며 인기글·개념글로 등극한다. 대중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여기며 혐오와 반목이 가득한 게시물들을 클릭과 추천을 통해 선택하는 것이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클릭수와 추천수가 민주주의 선거에서의 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런 수준을 넘어 오롯이 우리만이 모이는 커뮤니티가 자연스레 생성되거나 우리만을 위한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온라인 유저들은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일부분이 되어 혐오를 효율적으로 전파한다. 자신들과 반대되는 의견에 링크를 걸어 집단적으로 공격하며 그것을 일종의 콘텐츠로 여기게 된다. ‘’, ‘극혐등 타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단어도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이렇게 대중들은 현실 혹은 진실과 분리된다. 아이히만이 나치독일의 언어규칙에 둘러싸여 기껏해야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상투어나 관청용어를 말할 수밖에 없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무사유와 비이성이 대중들에게 만연하게 퍼지면서 한국의 대중들에 의해 악의 평범성이 실현되는 중이다. , 인간 사회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향이 아닌 전쟁상태로의 돌입에 열심히 부역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더욱 심각해져 나중에 혐오에 근거를 둔 집단적 형태의 범죄가 발생한다면, 그 범죄의 주체들은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할까. 없다고 주장한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까.

 

아이히만은 독일 국민들 전체와 나치 체제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아이히만은 거의 모든 독일인들이 잠재적으로 유죄라고 주장하며 자신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에 반발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당연히 유죄라고 보았다. 잘못된 목적을 가진 법과 체제를 체화해 적극적으로 그에 부역했기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유가 제거된 인간이 무지하고 무식한 상태로 범죄의 일부에만 가담했다고 해서 무죄라고 할 수는 없었다. 종국적으로는 귀중한 타인의 자유가 침해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본인의 무사유 혹은 지적 미성숙은 타인의 자유가 침해된 것에 대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물론 아이히만을 만들어낸 독일 국민들 역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현재 한국 대중들의 행태는 점점 아이히만 혹은 2차 대전 전후의 독일 국민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혐오가 가득한 사회로 가기를 선택하였거나 온라인 공간에서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을 쓰면서 적극적으로 혐오를 키우는 데 가담하고 있다. 게다가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혐오행위의 미러링은 책임회피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예시이다. “‘그들이 먼저 시작했기에 우리도 한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사람들은 거대한 죄의 수렁에 빠져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렌트는 당시 독일을 포함한 유럽이 도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타자 중심적 윤리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와 같은 상대주의적 관점의 윤리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학살당한 유대인들에게 타인인 독일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함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이끈 입장에 동의하라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되새겨보아야 할 것은 '자유'이다. 자유가 포괄하는 대상들, 자유의 주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도덕 등을 재인식하여 악의 평범성을 만들어낸 그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자유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서 협동하는 인간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다만 그것이 현실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혐오를 반대하고 자유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먼저 알게 된 자유의 개념에 대해서 전파하도록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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